요미우리 선수와 감독의 불상사와 처분 연표 1948〜2000년 - 벳쇼 영입 사건부터 스기야마 체포까지, 연맹과 구단의 처분 기록

답 - 6건, 세 가지 처분 유형, 처분 뒤 다시 기용된 2명

1948년부터 2000년까지 요미우리 선수와 감독이 관련된 일 가운데, 이 연표는 연맹이나 구단의 처분이 기록으로 남아 있는 5건과, 처분이 아니라 구단의 대응이 비판받은 1973년 유구치 도시히코의 일을 함께 싣는다.

처분의 유형은 세 가지다. 첫째는 연맹이 구단을 처분한 유형으로, 요미우리는 1990년 구와타 건으로 벌금을 부과받았고, 1948〜1949년 벳쇼 영입 건으로도 제재금 10만 엔을 부과받았다고 한다. 둘째는 연맹이 선수나 감독을 처분한 유형으로, 1949년의 미하라와 1998년의 갈베스가 출장 정지를 받았고, 벳쇼도 개막부터 2개월 동안 공식전에 나설 수 없었다고 한다. 셋째는 구단이 스스로 처분한 유형으로, 1990년의 구와타, 1998년의 갈베스, 2000년의 스기야마가 여기에 해당한다. 구와타와 갈베스는 처분 뒤 구단이 다시 기용했다.

요미우리 선수와 감독의 불상사와 처분 (1948〜2000년)
연도대상사건처분
1948〜1949년요미우리와 벳쇼부정 영입제재금과 출장 정지
1949년미하라 감독난카이 포수 구타출장 정지 100일
1972〜1973년유구치 도시히코입원 중 급사구단에 비판
1990년구와타 마스미금품 수수와 거짓 해명등판 금지와 벌금
1998년갈베스심판에게 투구잔여 시즌 출장 정지
2000년스기야마 나오키체포당일 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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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1949년 - 벳쇼 영입 사건과 미하라 감독의 구타

1948년 시즌 뒤 난카이의 벳쇼 아키라는 연봉 협상이 결렬되자 요미우리와 가계약을 맺고 선금 10만 엔을 받았다고 한다. 연맹 통제위원회의 조사에서는 1948년 11월 27일 자로 요미우리가 벳쇼에게 10만 엔을 빌려준 차용증이 발견되었고, 입단을 전제로 한 기재가 있었다고 한다. 연맹은 이를 난카이 소속 선수에 대한 사전 교섭으로 인정하고, 1949년 3월 17일 재정에 앞서 요미우리에 제재금 10만 엔을 부과했다고 전해진다.

벳쇼가 난카이와의 계약을 계속 거부하자, 연맹 통제위원회는 1949년 3월 17일 난카이에 10일간의 우선 교섭권을 인정하고, 벳쇼는 개막부터 2개월 동안 공식전에 나설 수 없다고 재정했다고 전해진다. 3월 28일 요미우리와의 계약이 성립했고, 요미우리는 난카이에 이적료 21만 엔을 냈다고 한다. 벳쇼는 이적과 함께 이름을 아키라에서 다케히코로 바꿨다고 한다.

이 일로 두 구단의 경기가 살벌하던 1949년 4월 14일, 고라쿠엔에서 열린 난카이전 9회에 1루 주자 쓰쓰이 게이조(포수)가 병살을 방해하는 듯한 슬라이딩을 해 유격수 시라이시 도시오와 말다툼이 벌어졌다. 미하라 오사무 감독은 수비 방해를 주장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돌아가던 중 말다툼을 계속하는 쓰쓰이의 머리를 뒤에서 때렸다. 다음 날인 4월 15일 니혼게이자이신문은 이를 '일본 야구 전대미문의 불상사'라고 보도했다.

미하라는 곧바로 출장 정지가 되었고, 나카지마 하루야스가 선수를 겸해 감독 대행을 맡았다. 연맹은 4월 19일 다시 시즌 종료까지의 출장 정지를 부과했으나, 주위의 구명 운동으로 처분은 100일로 줄었고, 미하라는 7월 21일 처분이 풀려 7월 23일 복귀했다고 한다. 그 경기는 요미우리가 끝까지 지켜 이겼고, 요미우리는 1949년 전후 첫 우승을 차지했다. 당시 야구계의 사정은 점령기 야구 부흥 기사에 정리했다.

1972〜1973년 - 유구치 도시히코의 급사와 구단에 대한 비판

유구치 도시히코는 1970년 드래프트 1순위로 기후단기대학부속고에서 입단한 좌완이었다. 1972년 11월 23일 팬 감사의 날 청백전에서 타순 한 바퀴 내내 난타당해 가와카미 데쓰하루 감독과 나카오 히로시 2군 감독에게 질책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그날 밤 숙소로 돌아가지 않은 유구치를 나카오가 때렸다고 한다. 11월 27일 납회에서는 말을 걸어도 대답하지 않았고, 다음 날 팀 닥터에게 우울증 진단을 받아 도쿄의 병원에 긴급 입원했다고 한다.

1973년 1월 10일 유구치는 신주쿠구의 세이와 병원으로 옮겨졌다고 한다. 원장은 커미셔너인 우치무라 유시였다. 2월 15일 구단의 뜻에 따라 다마가와 그라운드에 복귀하고 2월 19일 미야자키 캠프에 합류했으나, 다시 세이와 병원에 입원했다고 한다. 구단은 3월 들어 내규에 따라 입원비 지급을 중단했다고 전해진다.

3월 22일 유구치는 입원해 있던 병원에서 사망했다. 구단과 병원은 사인을 심장마비라고 발표했고, 병원 의사는 '사인은 심장마비, 돌연사'라고 설명했다. 자살이 아니냐는 소문이 돌았고, 주간지 슈칸포스트는 약 2주 뒤 '자살이었다'는 특집을 실었다.

가와카미 감독은 '나카오를 탓하지 말아 달라. 나카오의 책임이라면 내 책임이다'라고 말했고, 우치무라는 '유구치 군은 나도 두세 번 진찰했다. 성격이 내성적이었다. 자기 의견을 주장하지 못하고 남에게 떠밀리는 청년이었다'고 말했다. 가와카미가 성명에서 '그나마 다행인 것은 여성을 태운 교통사고가 아니었다는 점'이라고 말한 것이 결정타가 되어 구단에 대한 비판이 거세졌다고 전해진다. 1973년 드래프트에서는 요미우리가 지명한 7명 가운데 1순위 고바야시 슈이치, 2순위 구로사카 유키오, 3순위 나카무라 유지, 5순위 오니시 가즈오 등 4명이 입단을 거부했다고 한다. 요미우리와 드래프트를 둘러싼 문제는 요미우리의 드래프트 문제 기사에서 다룬다.

1990년 - 구와타 마스미의 금품 수수와 구단과 연맹의 두 가지 처분

1990년 봄, 구와타 마스미가 지인에게서 금품을 받고 자신의 등판일을 흘렸다고 스포츠 신문이 보도했다. 구와타는 처음에 둘 다 부인했지만, 그 해명은 나중에 거짓으로 드러났다.

구단은 3월 30일 금품 수수 등이 통일계약서 제17조(모범 행위)에 어긋난다며 시즌 개막 뒤 등판 금지 1개월과 벌금 1,000만 엔의 처분을 내렸다. 이 일은 국회에서도 거론되었다. 센트럴리그의 가와시마 히로모리 회장은 4월 2일 구와타 건으로 요미우리에 벌금 2,000만 엔을 부과했다.

한편 구와타가 그 지인과 야구 도박에 관여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2002년 3월 28일 도쿄지방법원 판결문에서 확인된다. 구와타의 경기장 밖 문제는 구와타 마스미의 경기장 밖 문제 기사에서 다룬다.

1998년 - 갈베스의 투구와 출장 정지 뒤의 재계약

1998년 7월 31일 고시엔에서 열린 한신전에 선발 등판한 발비노 갈베스는 6회 말 쓰보이 도모야에게 던진 몸쪽 직구가 볼로 판정되고 다음 공에 홈런을 맞자 주심 깃타 아쓰시에게 항의했다. 나가시마 시게오 감독이 교체를 알렸고, 더그아웃으로 돌아가던 갈베스는 깃타를 향해 공을 던졌다. 공은 아무에게도 맞지 않았다. 퇴장이 선언되자 달려온 깃타와 갈베스 사이에 난투극이 벌어졌고, 말리러 들어간 포수 요시하라 고스케는 갈베스의 팔꿈치에 얼굴을 맞아 입안이 찢어졌다.

다음 날인 8월 1일 센트럴리그는 갈베스에게 1998년 시즌 잔여 경기 출장 정지를 부과했고, 요미우리도 무기한 출장 정지 처분을 내렸다. NPB의 센트럴리그 약사는 7월 31일 항목에 '심판에게 공을 던지는 폭거를 저질러 퇴장 처분. 다음 날 회장은 시즌 종료까지 출장을 정지한다고 했다'고 적고 있다. 8월 2일 경기에서는 다케가미 시로 코치가 선수에게 폭행을 가해 퇴장당했고, 출장 정지 3경기와 제재금 30만 엔을 부과받았다.

8월 4일 갈베스는 구단 사무실에서 야마무로 대표와 약 3시간 동안 이야기했고, 구단은 통일계약서 제7조(사고 감액)에 따라 감봉하겠다고 전했다. 연봉 1억 엔인 갈베스의 경우 출장 정지가 되는 8월부터 4개월분, 추정 4,000만 엔이 깎일 전망이었고, 야마무로 대표는 제재금에 대해 '감봉이라는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시즌이 끝난 뒤 요미우리는 갈베스와 재계약했다. NPB 심판단은 연맹에 항의문을 보내 계약 취소를 요구했지만 계약은 철회되지 않았다고 한다. 갈베스는 1999년 요미우리에서 처음으로 외국인 개막전 선발 투수를 맡았다. 심판에 대한 폭력과 처분의 변천은 심판에 대한 폭언 문제 기사에 정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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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 스기야마 나오키의 체포와 같은 날의 해고와 간부 처분

2000년 10월 25일 미야자키현 경찰 미야자키키타서는 일본시리즈를 앞두고 미야자키에서 훈련하던 요미우리의 포수 스기야마 나오키를 강제추행치상 혐의로 체포했다. 스기야마는 혐의를 부인했다. 스기야마는 같은 날 오전 구단에 퇴단원을 냈고, 구단은 오후 3시가 조금 지나 이를 수리함과 동시에 그를 해고했다. 와타나베 쓰네오 구단주는 같은 25일 자로 야마무로 구단 대표에게 1년간 10 % 감봉, 나가시마 시게오 감독에게 견책 처분을 내렸다.

커미셔너 사무국이 그를 자유계약선수로 공시한 것은 다음 날인 10월 26일이었다. 그 뒤 피해자와 합의가 성립했고, 사회적 제재를 받았다는 점도 고려되어 기소유예가 되었다. 현역 선수의 체포는 1991년 요코하마 다이요의 나카야마 히로아키 이후 처음이었다.

견해 - 영입 방식, 선수에 대한 대응, 처분 뒤 다시 기용하는 유형

처음 두 건은 선수 개인의 문제라기보다 구단의 자세에 관한 이야기로 읽힌다. 요미우리의 영입 방식은 사전 교섭으로 연맹의 제재를 받았고, 그 앙금이 남은 경기에서 감독이 직접 상대 선수에게 손을 댔다. 그럼에도 요미우리는 그해 전후 첫 우승을 차지했다. 처분의 경중을 어떻게 볼지는 독자에게 맡긴다.

1973년 유구치 건에서는 구단의 설명과 선수에 대한 대응에 당시부터 강한 비판이 있었다. 질책과 구타했다는 일, 입원 중인 선수를 구단의 뜻으로 돌려보냈다는 판단, 입원비를 끊었다는 일, 성명의 말이 비판의 대상이 되었고, 이듬해 드래프트에서는 지명된 4명이 입단을 거부했다고 한다.

1990년과 1998년은 구단이 처분을 내린 뒤 선수를 다시 기용한 유형이다. 구와타는 1개월의 등판 금지 뒤 복귀했고, 갈베스는 무기한 출장 정지 뒤 재계약되어 이듬해 개막전 선발 투수를 맡았다. 심판단이 항의했다고 하는 가운데 이뤄진 재계약은 구단이 심판에 대한 폭력에 어디서 선을 긋는지를 보여 주는 예로 읽을 수 있다.

2000년 스기야마 건에서는 체포 당일에 퇴단원 수리와 해고를 마쳤고, 구단 대표의 감봉과 감독의 견책도 같은 날짜로 냈다. 선수를 내보내는 데 그치지 않고 구단 간부와 감독도 처분 대상으로 삼은 형태다.

읽는 법과 한계

오래된 사건이어서 당시 신문 지면 자체는 확인하지 못했다. 이 연표에서는 신문, 판결문, NPB 센트럴리그 약사의 뒷받침이 있는 사실은 단정해서 썼고, 이차 자료에만 근거한 기술은 '~라고 한다', '~라고 전해진다'의 형태로 썼다.

유구치의 사인은 단정하지 않았고, 처분 날짜를 알 수 없는 것은 날짜를 쓰지 않았다. 피해자의 정보도 싣지 않았다. 선수 개인은 평가하지 않았으며, 견해는 구단의 방침과 제도에만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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