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1년 11월 25일 - 진학 예정인 주장을 요미우리가 3순위로 지명
1981년 11월 25일 호텔 그랜드 팰리스에서 열린 제17회 드래프트 회의에서 요미우리는 PL 학원고의 요시무라 다다아키를 3순위로 지명했다. 요시무라는 그해 봄 제53회 선발고교야구대회에서 창단 첫 전국 우승을 차지한 PL 학원의 주장이자 1루수였지만, 지명을 받은 시점에는 호세이대학에 진학할 생각이었다. 요미우리가 이 회의에서 지명한 6명은 모두 추첨 없이 교섭권을 얻었다.
| 순위 | 선수 | 소속 |
|---|---|---|
| 1순위 | 마키하라 히로미 | 오부고 (투수) |
| 2순위 | 야마모토 고지 | 나고야전기고 (포수) |
| 3순위 | 요시무라 다다아키 | PL 학원고 (내야수) |
| 4순위 | 하시모토 게이지 | 후지중공업 (투수) |
| 5순위 | 무라타 신이치 | 다키가와고 (포수) |
| 6순위 | 니무라 가오루 | 와세다대 (투수) |
요미우리가 PL 학원 선수를 지명한 것은 요시무라가 처음이었다. 1955년 창단부터 이때까지 PL 출신 프로 선수는 23명으로, 한큐 5명, 야쿠르트 4명, 요코하마 다이요 3명, 주니치와 히로시마와 롯데와 닛폰햄이 각 2명, 한신과 긴테쓰와 난카이가 각 1명이었다. 요미우리와 세이부만 한 명도 영입하지 않았다. 그 요미우리가 처음으로 손을 뻗은 PL 선수가 진학을 공언한 주장이었다.
같은 회의에서는 교와발효의 쓰다 쓰네미가 요미우리에는 지명돼도 가지 않겠다고 말했다고 호소다 마사시의 연재 「1985 영웅들의 드래프트」(겐다이 비즈니스)는 전하며, 쓰다는 히로시마가 단독 1순위로 지명했다.
"아마 진학할 것 같습니다" - 지명 직후의 요시무라와 PL 학원
호치신문 1981년 11월 26일 자에 따르면 지명을 받은 요시무라는 예상 밖이라 놀랐다고 말했다. 요미우리를 좋아하고 오 사다하루를 존경하기 때문에 기쁘다고 하면서도 "프로에서 할 자신이 없습니다"라고 털어놓았고, 상의한 끝에 "그래도 아마 진학할 것 같습니다"라고 답했다. 같은 신문 12월 2일 자에서는 선발대회 우승 뒤 한때 프로를 의식했지만 여름 예선에서 만족스러운 타격을 하지 못해 "이래서는 도저히 프로에서 통하지 않는다고 생각해 호세이대 진학을 결정했습니다"라고 말했다.
호세이대학은 PL 학원 야구부의 주요 진학처였다. 니시다 신지, 기도 가쓰히코, 고바야카와 다케히코 등을 포함해 2014년 폐부까지 도쿄6대학 가운데 가장 많은 18명이 호세이대학에 진학했다. 요시무라와 같은 학년으로 벤치에 든 11명 중 6명이 대학에 진학했고, 에이스 니시카와 요시아키를 포함한 3명이 호세이대학으로 갔다.
PL 학원 야구부 출신으로 부장을 지낸 이모토 도시히데는 같은 연재의 취재에서, 요시무라의 호세이대학 진학이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드래프트 전에 인사하러 온 구단이 하나도 없었고 요미우리의 이토 기쿠오 스카우트도 오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고 답했다.
요미우리는 왜 지명했나 - 이토 기쿠오 스카우트의 증언
지명을 밀어붙인 사람은 간사이 지역을 담당하며 '이토키쿠'로 불린 스카우트 이토 기쿠오였다. 논픽션 작가 사세 미노루의 취재에 응한 잡지 『호세키』 1987년 12월호에서 이토는 사전 조사로 요시무라가 어릴 때부터 요미우리 팬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고 밝혔다. 그러고는 후지타 모토시 감독에게 "아와구치 겐지보다 위로 갈 것 같습니다. 그냥 넘길 이유가 없습니다. 지명해서 설득해 봅시다"라고 건의했다고 한다.
같은 취재에서 이토는 돈이 결정적이었다는 견해도, 요시무라에게 다른 구단에는 "프로에 가지 않는다고 말해 두라"고 했다는 밀약설도 부정했다. 젊은 선수는 계약금 액수보다 장래를 생각하고, 다른 구단이 지명하지 않는다는 보장도 없다는 이유였다. 결정적 요인을 묻자 요미우리라는 팀의 전통, 그리고 어차피 프로에서 할 거라면 요미우리에서 하고 싶다는 본인의 마음이라고 답했다.
이토는 12월 8일 교섭 자리에서 요시무라에게 "진학 가능성이 너무 강해서 지명은 3순위가 됐다"고 말했다 (호치신문 1981년 12월 9일 자). 발과 어깨를 갖춘 파워 있는 요시무라의 힘이 필요하다며, 그해 고교 타자 중에서는 우타자 가네무라 요시아키 (호토쿠가쿠엔)와 좌타자 요시무라가 최고라고 평가했다. 외야를 외국인 선수 토머슨과 화이트에게 맡기고 있어 젊은 외야수가 부족하다는 구단 사정도 있었다. 이토의 말대로 읽으면 요미우리는 진학 표명을 알면서 순위만 낮추고, 본인의 요미우리 사랑에 기대어 지명에 나선 셈이다.
12월의 교섭 - 난항 끝에 입단
드래프트 6일 뒤인 12월 1일, 이토는 돈다바야시시의 PL 학원을 찾아 다시 지명 인사를 했다. 응대한 부교장 겸 야구부장 하시구치 마사루와 감독 나카무라 준지는 본인과 직접 교섭해도 좋다고 전했고, 12월 4일 교단 부지 안의 겐시료에서 첫 교섭을 열기로 정해졌다.
12월 8일 두 번째 교섭은 예상보다 난항을 겪었다. 동석한 하시구치는 "대학, 사회인을 거쳐 프로에 간 우리 졸업생은 꽤 성공했지만, 바로 들어간 선수는 성장이 정체되어 있다"고 말했다 (호치신문 1981년 12월 9일 자). 요시무라도 프로에 대한 불안은 옅어졌지만 진학을 결정했던 만큼 동료들과 함께 대학에 가서 진구에서 야구를 하고 싶은 마음도 있다며 망설임을 드러냈다.
결국 요시무라는 요미우리에 입단해 1982년 프로 생활을 시작했다. 1986년과 1987년에 베스트 나인에 뽑혔고, 1988년 7월 6일 수비 중 충돌로 왼쪽 무릎 인대 3개가 끊어졌지만 1989년 9월 2일 복귀했다. 1998년 통산 타율 .296으로 은퇴한 뒤 코치와 2군 감독을 거쳐 2022년 편성본부장이 되었다.
요시무라가 언제 입단을 결심했는지, 누가 어떻게 설득했는지, 계약금이 얼마였는지는 이 글이 근거로 삼은 자료에서는 확인되지 않았다.
4년 뒤의 구와타 마스미 - 같은 유형의 지명
1985년 11월 20일 제21회 드래프트 회의에서 기요하라 가즈히로에게는 6개 구단이 1순위로 입찰했고 세이부가 교섭권을 얻었다. 와세다대학 진학을 표명하고 4일 뒤 입학 특별 선발 시험을 볼 예정이던 구와타 마스미는 요미우리가 단독 1순위로 지명했고, 구와타는 시험을 포기하고 입단했다. 자세한 경위는 KK 드래프트 기사에 정리되어 있다.
| 항목 | 요시무라 다다아키 | 구와타 마스미 |
|---|---|---|
| 출신 | PL 학원고 | PL 학원고 |
| 지명 전 진로 | 호세이대학 진학 | 와세다대학 진학 |
| 다른 구단 | 지명 회피 | 지명 회피 |
| 본인의 의향 | 어릴 때부터 요미우리 팬 (스카우트의 사전 조사) | 요미우리 1순위라면 입단하겠다고 생각했다고 회견에서 발언 |
| 지명 후 | 직접 교섭 끝에 입단 | 시험을 포기하고 입단 |
| 순위 | 3순위 | 1순위 |
관여한 스카우트도 같았다. 이토 기쿠오는 1985년에도 기요하라와 구와타의 사전 면담을 맡았다. 4년 전 3순위로 관철한 지명을 요미우리가 1순위로 되풀이했다고 읽을 수 있다.
다만 다른 진로를 표명한 고교생을 지명하는 수법이 요미우리만의 것은 아니었다. 1981년 같은 회의에서 세이부는 프로 입단을 거부하던 나고야전기고의 구도 기미야스를 6순위로 강행 지명해 입단시켰고, 1순위 이토 쓰토무는 사이타마현으로 전학시켜 구단 직원으로 붙잡아 둔 뒤 단독 지명했다.
프로 지망서가 막은 것
2003년도까지는 고교 졸업 예정 선수가 프로 구단과 교섭하려면 일본고교야구연맹의 지방 조직에 퇴부서를 내야 했지만, 진학을 표명한 선수라도 지명 자체는 가능했다.
프로 지망서 제도화 이전의 분쟁으로 자주 거론되는 것은 1973년 한큐의 에가와 스구루 (입단 거부), 1981년 세이부의 구도 기미야스, 1985년 요미우리의 구와타 마스미, 1994년 다이에의 조지마 겐지 4건이다. 요시무라의 이름은 이 가운데 없지만 지명의 유형은 구와타와 같다. 에가와가 뒤에 요미우리에 입단한 경위는 에가와 사건 기사에 있다.
2004년도에 고교생의 프로 지망서가 제도화되었다. 일본고교야구연맹에 지망서를 내지 않은 선수는 진학이나 취업을 희망하는 것으로 간주되어 드래프트에서 지명받을 수 없다. 접수는 여름 전국대회 폐막 후 시작되고 마감은 드래프트 회의 2주 전이다. 대학생도 2007년도부터 의무화되었다 (희망 입단 틀의 폐지와 같은 과정에서 정해진 조치).
지망서를 내지 않으면 지명 자체가 불가능하므로, 진학을 표명한 고교생을 지명한 뒤 설득하는, 요시무라와 구와타에게 쓰인 유형은 2004년도부터 성립하지 않게 되었다. 남은 것은 지망서를 낸 뒤 특정 구단 외의 지명을 거부하는 형태이며, 이는 제도 밖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