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미우리가 페어플레이를 굽혔다고 비판받은 4개 장면 - 배스의 55호, 페타지니 고의사구, 와키야의 낙구, 가토의 위험구 판정

답 - 규칙을 어기지 않았는데도 비판받은 4개 장면

요미우리에는 규칙을 어긴 것은 아니지만, 상대의 타이틀과 기록, 혹은 심판의 판정을 자기에게 유리한 쪽으로 굽혔다고 비판받은 장면이 있다. 여기서 다루는 4개 장면 가운데 1985년과 1999년은 상대 타자의 타이틀이나 기록이 걸린 타석에서의 고의사구이고, 2011년과 2012년은 영상으로는 요미우리에 불리해 보이는 플레이가 요미우리에 유리하게 판정된 사건이다.

비판받은 4개 장면
연도장면벤치 또는
선수의 행동
당사자의 반응
1985년배스의 55호2경기 볼넷 공세오 감독은 지시를 부인
1999년페타지니 고의사구7회에 고의사구 지시우에하라가 흙을 차며 눈물
2011년와키야의 낙구오른손을 들어 포구를 주장마유미 감독이 항의
2012년가토의 위험구 판정하라 감독이 어필구리야마 감독이 항의

고의사구는 작전으로 인정되고, 판정을 내린 것은 심판이다. 그런데도 4개 장면은 모두 보도와 상대 감독의 항의, 팬들의 목소리로 공정하지 않았다는 비판을 받아 왔다. 아래에서 장면별로 사실과 당사자의 반응을 정리하고, 마지막으로 벤치와 구단의 판단을 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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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 배스의 55호와 볼넷 공세

1985년 한신의 랜디 배스는 홈런 54개를 친 시점에서 남은 경기가 2경기였다. 2경기 모두 상대는 요미우리였고, 요미우리 감독은 1964년에 시즌 55홈런 기록을 세운 오 사다하루였다. 10월 22일 고시엔에서 선발 에가와 스구루는 3타석 모두 스트라이크로 승부했고 배스는 에가와와의 대결에서 2타수 1안타 1볼넷이었지만, 다른 투수들은 사실상 고의사구 공세였다. 10월 24일 고라쿠엔의 최종전에서는 1, 2, 4, 5번째 타석이 모두 스트레이트 볼넷이었고, 3번째 타석에서만 선발 사이토 마사키의 초구, 바깥쪽 높은 공에 달려들듯 방망이를 내 중전 안타를 쳤다. 이날 배스는 1타수 1안타 4볼넷이었고, 55호는 끝내 나오지 않았다.

다음 날 호치신문은 '배스 기록 달성 실패'라는 제목으로 "나는 배스에게 고의사구를 지시하지 않았다"는 오 감독의 코멘트를 실었다. 당시 스포츠닛폰에 따르면 배터리는 "오 감독의 지시는 없었다"고 했지만, 포수는 "감독님이 쌓아 오고 지켜 온 기록이니까"라고 털어놓았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2경기 10타석에서 9번 출루한 덕분에 출루율이 .428로 올라, 배스는 최고 출루율 타이틀까지 차지했다. 이해 그는 타율 .350, 54홈런, 134타점으로 타격 3관왕과 MVP를 차지했다. 배스의 경력과 3관왕의 2년은 배스에 관한 글에 있다.

1999년 - 페타지니 고의사구와 우에하라 고지의 눈물

1999년 10월 5일 야쿠르트전은 그해 요미우리와 야쿠르트의 마지막 맞대결이었고, 주니치의 우승이 확정된 뒤의 소화 경기였다. 홈런왕 경쟁은 요미우리의 마쓰이 히데키가 41개, 야쿠르트의 로베르토 페타지니가 42개였다. 마쓰이는 이 경기 내내 고의사구에 가까운 볼넷으로 계속 걸어 나갔다.

요미우리의 선발은 신인 우에하라 고지였다. 우에하라는 첫 번째와 두 번째 타석에서는 페타지니와 승부해 범타로 처리했지만, 7회말 세 번째 타석에서는 벤치의 고의사구 지시에 따라 스트레이트 볼넷으로 내보낸 뒤 마운드의 흙을 걷어차고 유니폼 소매로 눈물을 닦았다. 9회 네 번째 타석에서는 다시 승부해 적시타를 맞았지만, 2실점 완투승으로 이해 20승째(20승 4패)를 올렸다. 고의사구를 지시한 사람은 나가시마 시게오 감독이었다고 Smart FLASH의 2019년 기사는 쓰고 있다.

시즌이 끝났을 때 페타지니는 44개로 홈런왕과 최고 출루율 타이틀을 차지했고, 마쓰이는 42개였다. 마쓰이의 경력은 마쓰이에 관한 글에 있다.

2011년 - 와키야 료타의 낙구와 아웃 판정

2011년 4월 20일 고시엔의 한신전 7회. 1점을 앞선 한신이 2사 1, 3루를 만든 상황에서 크레이그 브라젤의 타구가 2루 뒤쪽으로 떴다. 2루수 와키야 료타는 넘어지면서 공을 잡고 공을 쥔 오른손을 들어 어필했고, 1루심은 아웃을 선언했다. 그러나 VTR 슬로 화면에서는 공이 글러브에서 한 번 빠져 땅에 튀었고, 와키야가 그것을 다시 주워 들고 있었다. TV 아사히 중계의 해설자도 "이건 떨어졌네요"라고 말했다. 한신의 마유미 아키노부 감독이 벤치에서 나와 항의했지만 판정은 뒤집히지 않았고, 요미우리가 역전해 5대 4로 이겼다.

경기 후 와키야는 스포츠닛폰 취재에 "잡았어요. 저는 아슬아슬한 데서 하고 있으니까요. VTR? 텔레비전 화면이 안 좋았던 거 아닌가요"라고 답했다. 다음 날인 21일 경기에서는 타석에 설 때 큰 야유를 받았고, Twitter에서도 비판이 퍼졌다. 보도는 이 판정을 오심이라고 썼다.

와키야가 낙구를 인정한 것은 7년 뒤였다. 2018년 10월 6일 미야자키에서 열린 팜 일본선수권 한신전에서 대타로 현역 마지막 타석에 선 와키야는 한신 팬들에게 고개 숙여 인사하고 "고시엔의 그 일로 제 행동이 한신 팬과 프로야구 팬에게 상처를 주고 슬프게 만들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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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 일본시리즈의 위험구 판정과 가토 겐

2012년 11월 1일, 삿포로 돔에서 열린 일본시리즈 5차전. 4회초 무사 1루에서 보내기 번트 자세를 취한 가토 겐에게 닛폰햄의 두 번째 투수 다다노 가즈히토가 던진 몸쪽 높은 공이 얼굴 근처를 지나 포수 뒤로 빠졌다. 가토는 몸을 젖히며 쓰러졌다. 야나기타 주심은 하라 다쓰노리 감독의 어필을 받아 머리에 맞은 사구로 판정하고, 다다노를 위험구로 퇴장시켰다. 일본시리즈에서 위험구 퇴장은 이것이 처음이었다.

닛폰햄의 구리야마 히데키 감독은 몇 분 동안 항의했지만 판정은 뒤집히지 않았고, 삿포로 돔은 야유로 뒤덮였다. 리플레이 영상에서는 공이 가토에게 맞지 않은 것처럼 보였고, 닛폰햄 포수 쓰루오카 신야는 "나무 소리가 났다"고 주장했다. 가토는 치료를 받지 않고 1루로 나갔고, 닛폰햄은 서둘러 모리우치 도시하루를 등판시켰다. 시리즈는 요미우리가 4승 2패로 이겨 일본 정상에 올랐다.

견해 - 벤치가 우선한 것과 구단의 사후 설명

1985년과 1999년의 2건은 상대의 기록이나 타이틀을 가로막은 고의사구다. 1985년에는 오 감독 본인과 배터리가 지시를 부인했고, 1999년에는 우에하라의 저서가 벤치의 지시라고 하고, 보도는 나가시마 감독의 지시라고 전한다. 두 경기 모두 에가와가 3타석 모두 스트라이크로 승부하고 우에하라가 두 번째 타석까지 페타지니를 처리했듯이, 투수 쪽에는 승부를 택한 흔적이 남아 있다.

그런데도 두 경기의 결과는 쌓인 볼넷으로 상대 타자를 멈춰 세운 모양이 됐다. 1985년에 걸려 있던 것은 요미우리 감독 자신이 보유한 기록이었고, 1999년에는 우승이 확정된 뒤의 소화 경기에서 자기 팀 타자의 타이틀 경쟁이었다. 어느 쪽도 경기의 승패 그 자체는 아니었다. 벤치가 경기보다 기록과 타이틀 경쟁의 향방을 우선했다고 받아들여진 점이 비판의 핵심이다.

2011년과 2012년의 2건은 유리한 판정을 그대로 받아들인 사건이다. 판정은 심판이 내리고, 선수나 감독의 어필도 규칙의 범위 안에 있다. 다만 영상이 판정과 어긋나고 상대 감독이 항의한 장면에서, 와키야는 7년 뒤 스스로 낙구를 인정하고 한신 팬들에게 고개를 숙였지만, 2012년 가토의 건에 대해 구단의 설명은 없다. 일본시리즈 첫 위험구 퇴장을 낳은 판정이라면, 이긴 구단으로서 사후에 견해를 밝힐 책임이 있었을 것이다.

심판의 판정이 요미우리에 치우쳐 있는지에 대한 검증은 심판 판정의 편향을 다룬 글에서 다룬다. 이 글은 4개 장면의 사실과 반응에 한정했다.

읽는 법과 한계

4개 장면은 모두 규칙 위반이 아니다. 고의사구는 작전으로 인정되며, 2011년과 2012년의 판정은 모두 심판이 내렸고 항의를 받고도 뒤집히지 않았다. 이 글이 비판하는 대상은 벤치의 판단과 구단의 자세이며, 비판의 주체는 보도와 상대 감독, 팬의 범위로 한정했다.

고의사구의 '지시'는 1985년의 경우 오 감독과 배터리의 부인을 함께 적었고, 1999년의 경우 우에하라의 저서가 말하는 벤치의 지시와 보도가 전하는 나가시마 감독의 지시를 나누어 적었다. 투수와 야수 개인에 대한 평가는 하지 않았다. 2012년의 투구가 몇 구째였는지처럼 자료에 따라 엇갈리는 점은 적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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