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나가시마 시게오 감독 해임 - 'A클래스면 유임' 공언을 뒤집은 것은 요미우리신문사 사장이었다

답 - A클래스를 확보한 감독을 신문사 사장이 바꿨다

1980년 10월 21일, 요미우리는 나가시마 시게오 감독의 사임과 후지타 모토시의 신임 감독 취임을 발표했고, 이튿날인 22일 요미우리신문은 1면에서 '사임'으로 보도했다. 그러나 나가시마의 해임을 결단한 사람은 구단주 쇼리키 도루가 아니라 모회사 요미우리신문사의 사장 무타이 미쓰오였으며, 결단은 시즌이 끝나기 전에 이미 내려져 있었다. 형식은 사임, 실태는 해임이다.

요미우리는 그해 61승 60패 9무로 3위를 차지해 A클래스(6개 구단 리그의 상위 절반)를 확보했다. 구단은 A클래스를 확보하면 유임이라고 공언했는데, 이것이 뒤집히면서 '음모'라는 말까지 나왔다. 나가시마가 떠안은 것은 양대 리그 체제 출범 후 처음으로 3년 연속 우승을 놓친 책임이었다. 요미우리가 3년 연속 우승을 놓친 것은 단일 리그 시대인 1944~1948년(1945년은 중단) 이후 처음이었다.

감독의 거취를 정한 것은 구단이 아니라 신문사의 수뇌였고, 구단이 스스로 공언한 유임 조건은 그 판단 앞에서 아무 의미도 갖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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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시즌 - 61승 60패 9무의 3위

나가시마 감독의 6년째는 개막 3연패로 시작됐다. 월말 순위는 4월 말 3위(선두와 2.5경기 차)에서 5월 말 5위(6.5경기 차)로 떨어졌고, 7월 말에도 5위에 머물며 차이는 16.0경기까지 벌어졌다. 8월에 7연승을 거둬 8월 말에는 3위로 돌아왔지만 9월 말에는 4위(19.0경기 차)였다. 10월을 10승 2패로 마무리해 선두 히로시마에 14.0경기 뒤진 3위로 마쳤다.

1980년 센트럴리그 상위 4개 구단
구단순위성적선두와의 차
히로시마1위73승 44패 13무-
야쿠르트2위68승 52패 10무6.5
요미우리3위61승 60패 9무14.0
다이요4위59승 62패 9무16.0

마운드는 버텼다. 에가와 스구루가 16승으로 최다승, 219탈삼진으로 최다 탈삼진을 차지해 두 부문 모두 첫 타이틀을 얻었고, 팀 평균자책점 2.95는 리그에서 유일한 2점대였다. 타선은 반대였다. 팀 타율 .243은 리그에서 유일하게 .250을 밑돌았다. 5월에 40세가 된 오 사다하루는 30홈런을 쳤지만 타율 .236은 규정 타석을 채운 타자 가운데 리그 최하위였다.

3위가 정해진 것은 10월 19일과 20일이다. 일본시리즈를 앞두고 조정 중이던 히로시마에 연승해 다이요와의 3위 다툼에서 이겼다. 발표는 그다음 날이었다. 오 사다하루는 닛칸스포츠(2024년 12월 21일)에 당시 그해를 끝으로 은퇴하기로 마음먹고 기자회견장까지 마련해 두었는데, 자신의 회견이 갑자기 취소되고 그 회견장에서 나가시마의 사임 회견이 열렸다고 말했다. 오 사다하루가 '체력의 한계와 내 타격을 할 수 없게 됐다'며 은퇴를 발표한 것은 11월 4일이며, 11월 11일 후지타 체제가 정식으로 출범했다.

누가 결정했나 - 요미우리신문사 사장 무타이 미쓰오

무타이 미쓰오는 1929년 요미우리에 입사해 판매 부문에서 경력을 쌓으며 '판매의 귀신'으로 불렸다. 1969년 10월 쇼리키 마쓰타로가 세상을 떠난 뒤 1970년대 초부터 사장을 맡았고, 1981년 회장, 1983년 명예회장이 됐다. 대표권은 놓지 않았고, 1991년 4월 30일 94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요미우리의 최고 실력자였다. 1970년대부터 1990년대 초까지 구단의 실질적인 오너로서 감독 인사를 결정하는 위치에 있었다.

스즈키 요이치의 책 『巨人軍監督の決断』(고단샤, 1987년)은 무타이의 신조로 구단은 요미우리의 것이 아니라 대중의 것이라는 말을 전한다. 무타이가 쇼리키 도루와 나가시마에 대한 불신을 키운 요인으로는 두 가지가 꼽힌다. 나가시마 시대 후반에 3년 연속 우승을 놓친 것, 그리고 무타이가 병으로 요양하느라 자리를 비운 사이 쇼리키 도루가 일으킨 1978년의 '공백의 하루', 곧 에가와 사건이다(경위는 에가와 사건 기사).

무타이의 결정은 1980년으로 끝나지 않았다. 1988년 시즌 도중 오 사다하루 감독을 해임하고 후임으로 다시 후지타를 기용한 것도 무타이였다. 무타이가 살아 있는 동안 나가시마의 요미우리 복귀는 금기였다고 한다. 1991년 무타이가 세상을 떠나고 와타나베 쓰네오가 요미우리신문사 사장에 오르면서 나가시마의 감독 복귀로 가는 길이 열렸다.

해임에 이른 1975~1980년 - 6년의 성적과 OB의 간섭

나가시마의 제1차 감독 6년은 1975년 최하위(구단 사상 처음)로 시작됐다. 1976년과 1977년에는 리그 우승을 했지만 일본시리즈에서는 2년 연속 한큐에 졌다. 1978년 2위(야쿠르트와 3경기 차), 1979년 5위(히로시마와 10.5경기 차), 1980년 3위였다. 6년 동안 일본 제패는 한 번도 없었고, 6년 연속 일본 제패를 놓친 것은 단일 리그 시대를 포함해 가장 긴 기록이었다.

1978년 오프시즌에 에가와 사건이 터졌고, 에가와와의 맞교환으로 고바야시 시게루가 한신으로 옮겼다. 1979년 에가와는 9승 10패에 그쳤고, 요미우리는 개막 두 번째 경기부터 고바야시에게 8연패를 당해 9월 5일 5위로 떨어졌다. 그해 오프시즌에 팀을 떠난 하리모토 이사오는 기자들에게 '팀이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말했다. 나가시마는 가을의 '지옥의 이토 캠프'에서 젊은 선수 18명을 단련하고, 로이 화이트를 영입했으며, 아오타 노보루를 수석코치로 불렀다. 그러나 아오타는 1980년 1월 10일 『선데이 마이니치』 인터뷰의 설화로 근신 3개월 처분을 받고 1월 18일 퇴단했다.

OB와 언론의 압력도 있었다. 요미우리가 일본 제패를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보는 야구 언론과 팬 사이에서 가와카미 데쓰하루 대망론이 나왔다. 가와카미파로 불린 OB들은 나가시마의 팀 만들기에 간섭했고, 프런트는 1975년부터 1979년까지 코치 11명을 해임했다(이시즈카 기쿠오 『完全版 長嶋茂雄大事典』). 1978년에 물러난 구로에 유키노부는 나가시마에게서 '오른팔로서 잘해 줬지만 구단의 생각이다. 미안하지만 그만둬 달라'는 말을 들었다고 증언했다(닛칸겐다이 2015년 2월 11일).

1980년 8월에는 『주간 문춘』의 좌담회가 있었다. 가와카미가 아오타 노보루, 마키노 시게루, 후지타 모토시, 구니마쓰 아키라를 모아, 취재 담당 기자에게 비공개를 조건으로 하고 나가시마의 후임 감독을 논의했다. 기사는 며칠 뒤 실렸고, 아오타의 자서전 『じゃじゃ馬一代』에 따르면 '나가시마 끌어내리기의 물결은 피할 수 없는 것이 됐다'. 후임의 이름은 구단의 발표보다 먼저 구단 OB의 입을 통해 주간지에 나왔다. 인사가 정해지기 전에 여론이 만들어진 셈이다.

나가시마는 해임을 가와카미와 그 일파가 몇 년에 걸쳐 벌인 물밑 공작의 결과로 여겼고, 가와카미에 대한 악감정은 결정적이 됐다(오다 준타로가 2001년에 낸 나가시마 시게오 사전). 쇼리키 도루의 프런트 입성 권유는 '프런트는 성미에 맞지 않는다'며 거절하고, 퇴단 신청서를 내고 개인 사무소 '오피스 엔'을 설립했다. 가와카미가 OB회 회장이 된 뒤로는 계속 불참하다가 1990년 그해에도 출석하지 않으면 제명한다는 권고를 받고 출석해 가와카미와 '화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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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지타 체제와 야인의 12년

후임 후지타 모토시는 1980년 10월 21일 제10대 감독에 취임했다. 좌담회에 참석했고 가와카미가 후임으로 이름을 거론했던 후지타는 '나가시마파' 언론의 공격 대상이 됐다. 체제는 후지타, 수석코치 마키노 시게루, 조감독 오 사다하루로 이루어진 '트로이카 체제'였다. 후지타는 평생 무타이에 대한 은혜를 이야기했다.

1981년 요미우리는 73승 48패 9무, 승률 .603으로 리그 우승을 차지했고, 일본시리즈에서 닛폰햄을 꺾고 1973년 이후 처음으로 일본 제패를 이뤘다. 1980년 드래프트에서 4개 구단이 1순위로 경합한 하라 다쓰노리가 신인왕을 받았다. 그래도 후지타에 대한 공격은 이어졌고, 보도에는 '활약하는 것은 모두 나가시마가 이토에서 단련한 선수들'이라며 나가시마를 칭송하는 논조가 많았다.

나가시마는 1982년 1월 호치신문사의 객원 평론가가 되었고, 닛폰TV 계열에서 해설자로 활동했다. 다른 구단의 감독 제의는 모두 거절했다. 다이요(1981년과 1984년 오프시즌), 세이부(1981년 오프시즌), 닛폰햄(1983년 오프시즌), 주니치(1983년), 야쿠르트(1989년 오프시즌), 오릭스(1990년 오프시즌)이며, 다이요에는 '조금 더 공부하고 싶다'고 답했다. 복귀는 1992년 10월 12일 제13대 감독으로서의 회견이었고, 이듬해 출범하는 J리그에 대한 대책이라는 의미도 있었다.

읽는 법과 한계

이 기사가 근거로 삼은 자료에는 무타이와 나가시마가 해임에 대해 한 말이 없다. 이 해임으로 요미우리신문의 부수가 줄었다는 말도 있지만, 이를 뒷받침하는 숫자는 없다.

부르는 이름도 엇갈린다. 요미우리의 발표와 요미우리신문 1면은 '사임'이었지만, 이후의 기술에는 '해임'으로 쓴 것도 있다. 결단한 사람이 무타이였다는 기록을 따르면 실태는 해임으로 읽는 것이 맞다.

1980년의 일은 요미우리의 감독 인사가 구단이 아니라 모회사 수뇌의 판단으로 움직이는 구조의 이른 예로 읽을 수 있다. 그 구조의 이후는 와타나베 쓰네오의 시대와 2011년 기요타케의 난 기사에서 다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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