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6년 NPB 개막 - 일본 프로야구의 탄생

일본 직업야구 연맹의 창설

1936년 2월 5일, 일본 직업야구 연맹이 7개 구단으로 공식 출범했다. 도쿄 자이언츠, 오사카 타이거스, 나고야(후의 주니치 드래곤즈), 한큐, 다이도쿄, 나고야 긴코, 도쿄 세네터스가 참가했다. 리그 창설은 1934년 일미 야구 시리즈의 성공이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으며, 당시 베이브 루스와 루 게릭을 포함한 MLB 스타 선수들이 참가했다. 이 시리즈는 전국 16경기에서 50만 명 이상의 관중을 동원했다. 이 성공에 영감을 받은 요미우리 신문사의 쇼리키 마쓰타로가 프로야구 창설을 주도하여 1935년 말까지 7개 구단의 참가를 확정했다. 당시 일본 스포츠 문화에서는 대학야구가 압도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었으며, 와세다-게이오 전은 엄청난 관중을 끌어모았다.「직업야구」라는 용어에는 경멸적인 뉘앙스가 담겨 있었고, 프로 선수는「돈을 위해 야구를 파는 자」로 여겨졌다.

춘계·추계 2시즌제

원년 시즌은 춘계와 추계 두 시즌제로 운영되었다. 춘계 리그는 4월 29일에 개막하여 7개 구단이 라운드 로빈 방식으로 경쟁했다. 홈구장이 아직 정비 중이었기 때문에 고시엔 구장, 고라쿠엔 구장, 나루미 구장 등을 전전하며 경기를 치렀다. 도쿄 자이언츠가 춘계 리그 우승을 차지했고, 오사카 타이거스가 추계 우승을 거머쥐며 초대 추계 챔피언이 되었다. 연간 각 구단의 경기 수는 약 40경기로, 현재의 143경기에 비하면 훨씬 적었다. 경기당 평균 관중은 약 3,000명에 불과했으며, 대학야구 와세다-게이오 전이 수만 명을 동원한 것과는 극명한 대조를 이루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새로운 프로야구 사업은 일본 스포츠계에 뿌리를 내리는 첫걸음이 되었다.

사와무라와 가게우라 - 원년의 주역들

원년 시즌의 가장 빛나는 선수는 요미우리 투수 사와무라 에이지였다. 그는 1934년 일미 야구 시리즈에서 베이브 루스를 포함한 MLB 스타들을 상대로 호투하며 전국적인 명성을 얻었다. 1936년 프로 시즌에서 사와무라는 0.81이라는 경이적인 방어율을 기록하며 강속구와 날카로운 드롭 커브로 타자들을 압도했다. 한편 오사카 타이거스의 가게우라 오사무는 타율 .338, 방어율 1.69의 투타 겸업 성적을 남기며 오타니 쇼헤이와 같은 현대 이도류 선수의 선구자가 되었다. 그 외에도 요미우리의 미즈하라 시게루, 타이거스의 마쓰키 겐지로, 세네터스의 카리타 히사노리 등 후에 일본 야구계의 중요 인물이 된 선수들이 원년부터 활약했다. 대부분 대학야구나 사회인야구에서 전향한 선수들로, 당시 프로야구 참가는 큰 결단이었다.

모기업 모델의 기원

7개 구단의 재정 기반은 취약했으며, 신문사나 철도회사의 지원 없이는 존속할 수 없었다. 도쿄 자이언츠는 요미우리 신문사, 오사카 타이거스는 한신 전기철도, 나고야 구단은 주니치 신문사가 각각 지원했다. 이「모기업 모델」은 구단을 광고 매체로 자리매김한 비즈니스 모델로, 처음부터 구단 단독 수익성은 기대되지 않았다. 모기업은 구단의 적자를 부담하는 대신 신문 판매 촉진이나 철도 승객 증가 등 간접적 이익을 얻었다. 이 구조는 90년이 지난 현재까지 NPB의 근간을 이루고 있으며, MLB의 프랜차이즈 모델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일본 고유의 구단 경영 방식으로 정착했다. 원래 7개 구단 중 다이도쿄와 나고야 긴코는 몇 년 만에 사라졌지만, 요미우리, 타이거스, 드래곤즈 3개 구단은 현재까지 존속하며 일본 프로야구의 역사 그 자체를 체현하고 있다.

1936년이 남긴 유산

1936년의 개막은 일본 스포츠 역사의 전환점이었다. 아마추어리즘이 지배적이던 시대에 스포츠를 직업으로 성립시키는 길을 개척했다. 원년의 관중 동원은 제한적이었지만, 1937년 고라쿠엔 구장의 완공으로 프로야구의 상업적 기반이 갖춰지기 시작했다. 전시 중단을 거쳐 1950년 2리그제가 도입되면서 프로야구는 국민적 오락의 지위를 확립해 나갔다. 1936년에 뿌려진 씨앗은 90년에 걸쳐 12개 구단, 연간 약 2,600만 명의 관중을 동원하는 거대 산업으로 성장했다. 원년의 스타 사와무라 에이지의 이름을 딴 사와무라상은 NPB 최고의 투수에게 수여되는 영예로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으며, 첫 시즌의 기억이 제도적 유산으로 계승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