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 일본 프로야구 - 전쟁과 야구의 관계

군국주의와 야구에 대한 압력

1937년 중일전쟁 발발 이후 일본 사회는 급속히 군국주의화되었고, 프로야구도 예외가 아니었다. '적성어' 배제 운동이 강화되면서 1940년 영어 팀명이 금지되었다. 도쿄 요미우리는 '도쿄 교진군'으로, 타이거스는 '한신군'으로 개칭되었다. 야구 용어도 일본어로 대체되어 스트라이크는 '요시'(좋다), 볼은 '다메'(안 된다)가 되었다. 경기 전 국기 게양식과 국가 제창이 의무화되었고, 선수들은 야구복 위에 국민복을 입고 행진하기도 했다. 야구는 오락에서 국위 선양의 도구로 변질되었다.

선수 징병과 전사

전황이 악화되면서 프로야구 선수들에게도 징병 영장이 도달했다. 사와무라 에이지는 세 차례 징집되었고, 수류탄 투척 훈련으로 혹사당한 오른쪽 어깨는 투구 능력을 잃었다. 1944년 12월, 사와무라는 수송선 격침으로 27세에 전사했다. 사와무라 외에도 가게우라 마사루, 요시하라 마사키 등 많은 선수가 전장에서 목숨을 잃었다. 창설기 스타 선수들의 연이은 상실은 일본 야구계에 헤아릴 수 없는 타격이었다. 전후 제정된 사와무라 에이지상은 그의 업적과 희생을 영원히 기리기 위해 만들어졌다.

1944-1945년 - 존속의 위기

1944년 시즌은 공습 격화와 선수 부족 속에서 간신히 치러졌다. 각 팀은 약 15명의 선수로 운영했고, 경기 수도 대폭 축소되었다. 고라쿠엔 구장은 군수물자 집적소로 징발되어 경기장 확보가 극히 어려웠다. 1945년에 들어서면서 본토 공습의 격화로 공식전 개최가 완전히 불가능해졌다. 그러나 일부 관계자들은 지방에서의 비공식 경기와 위문 경기를 통해 프로야구의 불씨를 지키려는 노력을 계속했다. 이 시기의 기록은 많이 산일되었지만, 전시에도 야구를 지키려 했던 사람들의 집념이 전후 신속한 부활을 가능하게 했다.

전후 부활과 전쟁의 교훈

1945년 11월, 종전 불과 3개월 후 진구 구장에서 동서 대항전이 열렸다. 약 15,000명의 관중이 폐허 속에 모여들어 이 경기는 전후 부흥의 희망을 상징하는 사건이 되었다. 1946년 페넌트레이스가 재개되었고, 프로야구는 빠르게 국민 오락으로서의 지위를 회복했다. 전시 경험은 스포츠가 정치적·군사적 목적으로 이용되는 위험성을 보여주는 동시에, 국민의 정신적 지주로서 스포츠의 힘을 증명했다. NPB는 매년 8월 15일 전후로 '평화의 날' 행사를 개최하여 전쟁의 기억이 잊히지 않도록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