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문 순회공연의 시작 - 군부의 요청과 야구계의 협력
태평양전쟁 개전 후, 군부는 프로야구 선수들을 전선 병사 위문에 활용할 계획을 세웠다. 1942년부터 1944년까지 여러 차례 위문 순회공연이 실시되어 선수들은 중국 대륙, 동남아시아, 남태평양 각지에 파견되었다. 야구계는 이 요청을 거부할 입장이 아니었고, '나라를 위해'라는 명분 아래 선수들을 보냈다. 표면적으로는 '병사들을 격려하는' 활동이었지만, 실제로는 군사 선전의 일환으로 '후방 국민도 하나가 되어 싸우고 있다'는 메시지를 전선 병사들에게 전달하는 역할을 했다.
전쟁터의 야구 - 포성 속의 플레이볼
위문 순회공연에서 선수들이 목격한 것은 전쟁의 참혹한 현실이었다. 영양실조로 뼈만 남은 병사들, 말라리아에 시달리는 부상병들, 전사한 동료의 유품을 꽉 업고 있는 젊은 병사들. 그런 환경에서 선수들은 웃는 얼굴로 야구를 선보여야 했다. 급조된 그라운드에서 열린 경기는 병사들에게 잠시나마 오락이 되었지만, 선수들에게는 전쟁의 현실을 직면하는 경험이었다. 순회공연에서 돌아온 선수 중 일부는 목격한 광경이 트라우마가 되어 오랫동안 고통받았다고 전해진다.
돌아오지 못한 선수들
위문 순회공연에 참가한 선수 중에는 이후 징병되어 전쟁터에 남게 된 이들도 있었다. '일시적 파견'이었어야 할 순회공연이 전황 악화로 귀국이 불가능해지는 경우가 있었다. 순회공연 이동 중 적의 공격을 받을 위험도 존재했다. 수송선이 격침될 위험과 함께하는 항해를 경험한 선수도 있다. 위문 순회공연은 '안전한 활동'이 아니라 선수의 생명을 위험에 빠뜨리는 행위였다. 그러나 군부에게 선수의 안전은 부차적이었고, 선전 효과가 우선시되었다.
전후의 침묵과 기억의 계승
위문 순회공연의 경험은 전후 오랫동안 이야기되지 않았다. 참가했던 선수들 대부분은 전쟁터에서 목격한 참혹한 광경에 대해 말하기를 피했다. 전후 부흥기에 프로야구는 '희망과 오락의 상징'으로 재출발했고, 전쟁의 기억은 의도적으로 봉인되었다. 그러나 위문 순회공연의 기록은 야구가 전쟁에 이용된 역사의 증거이며, 잊혀서는 안 된다. 선수들이 전쟁터에서 목격한 현실, 군부의 선전에 협력하도록 강요받은 경험, 그리고 돌아오지 못한 동료에 대한 마음은 야구 역사의 일부로 기록되어 다음 세대에 전해져야 한다. 전쟁과 스포츠의 관계를 재검토하는 것은 평화로운 시대에야말로 필요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