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몰 야구인의 기록 - 전쟁에 스러진 선수들

전시하의 야구계와 선수 소집

1941년 12월 태평양전쟁 개전 이후, 일본 프로야구계는 급속히 전시 체제에 편입되어 갔다. 1943년에는 구단명의 영어 표기가 금지되어 'Giants'는 '거인군'으로, 'Tigers'는 '맹호군'으로 개칭되었다. 스트라이크는 '좋다', 볼은 '안 된다'로 일본어화가 강제되는 등 야구 용어의 일본어화도 이루어졌다. 선수들은 잇달아 소집영장을 받고 전장으로 보내졌다. 1944년에는 많은 구단이 활동을 정지했고, 1945년에는 리그전 자체가 중단되었다. 프로야구 역사에서 이 공백 기간은 가장 어두운 시대였다. 젊고 재능 넘치는 선수들이 배트와 글러브 대신 총을 쥐게 되어 다시는 다이아몬드로 돌아오지 못한 비극은, 일본 야구사에서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기억이다.

사와무라 에이지 - 전설적 투수의 최후

전몰 야구인 중 가장 널리 알려진 이는 사와무라 에이지이다. 그는 1934년 일미 야구에서 베이브 루스를 비롯한 메이저리거를 상대로 호투하며 일본 야구의 실력을 세계에 보여준 전설적 투수였다. 사와무라는 3차례에 걸쳐 소집을 받았으며, 첫 번째 소집에서 수류탄 투척 훈련으로 어깨를 다쳐 투수로서의 능력에 심각한 영향을 받았다. 그럼에도 복귀를 이루어 1940년에는 노히트노런을 달성하는 등 불굴의 정신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3번째 소집 후, 1944년 12월 2일 수송선이 동중국해에서 미군 잠수함의 어뢰 공격을 받아 침몰하면서 사와무라는 27세의 젊은 나이로 전사했다. 전후 그의 공적을 기려 창설된 사와무라 에이지상(사와무라상)은 NPB에서 가장 권위 있는 투수상으로 매년 수여되고 있다 (2024년 기준). 사와무라의 생애는 전쟁이 빼앗은 재능의 크기를 상징하고 있다.

이름 없는 선수들의 희생

사와무라 에이지의 이름은 널리 알려져 있지만, 전쟁에서 목숨을 잃은 프로야구 선수는 그뿐만이 아니다. 기록에 따르면 전전 프로야구 선수 중 최소 60명 이상이 전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신 타이거스의 와카바야시 다다시 투수는 하와이 태생의 일계 2세로 일본에서 프로야구 선수가 되어 전후에도 활약한 드문 사례이지만, 그의 팀 동료 중에는 전장에서 목숨을 잃은 이도 적지 않았다. 또한 프로 입단 전의 유망한 학생 야구 선수 중에도 많은 전몰자가 있었다. 그들이 전후 프로야구계에서 어떤 활약을 보여주었을지는 영원히 알 수 없다. 전몰 선수의 대부분은 20대의 젊은이로, 야구 인생의 전성기를 맞이하기 전에 목숨을 빼앗겼다. 개별 선수의 기록은 단편적으로만 남아 있어 전모를 파악하기 어렵지만, 한 사람 한 사람의 희생을 기록해 나가는 것은 야구계의 책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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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후의 추도와 기억의 계승

전후 프로야구계는 전몰 선수의 추도와 기억의 계승에 힘써 왔다. 1947년에 재개된 프로야구는 전몰 선수에 대한 진혼의 의미도 담겨 있었다. 야구 명예의 전당 박물관에는 전몰 선수에 관한 자료가 전시되어 있으며, 매년 8월 15일 종전기념일 전후에는 추도 행사가 열리고 있다. 사와무라상 시상식에서는 사와무라 에이지의 공적과 함께 전쟁의 비극이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전후 80년이 경과하고 전쟁을 직접 아는 세대가 줄어드는 가운데, 기억의 풍화가 우려되고 있다. 2010년대 이후에는 전몰 선수 유족에 대한 청취 조사와 전시 중 야구 관련 자료의 디지털 아카이브화가 진행되고 있다. 전몰 선수들의 희생을 통해 프로야구가 평화로운 시대에 즐길 수 있는 오락이라는 의미를 재인식하는 것은, 전후 세대 야구 팬에게도 중요한 일이다.

전시 체제와 야구계의 변용

태평양전쟁이 격화됨에 따라 프로야구계는 오락으로서의 존재 의의 자체를 물음 받았다. 군부는 야구를 '적성 스포츠'로 간주하는 풍조를 강화하여 시합 개최 자체가 어려워졌다. 1943년 시즌은 단축되었고, 1944년에는 정식 리그전이 소멸했다. 각 구단은 '익찬 시합'이라 불리는 위문 형식의 경기를 간신히 이어갔으나 1945년에는 완전히 중단되었다. 선수들 대부분은 군수공장 근로동원과 병역 사이에서 야구를 계속할 환경을 완전히 빼앗겼다. 이 시기에 잃어버린 것은 선수 개인의 목숨만이 아니다. 전전에 구축되던 프로야구의 조직 기반, 관객 문화, 기록의 축적도 전쟁에 의해 단절되었다. 전후 부흥은 이러한 단절로부터의 재출발이었다.

학도 출진과 미완의 재능

프로야구 선수뿐만 아니라 대학 야구와 중등학교 야구에서 장래를 촉망받던 젊은 선수들도 학도 출진에 의해 전장으로 보내졌다. 1943년 10월의 학도 출진은 문과계 학생의 징병 유예를 철폐하여, 많은 야구부원이 학업 도중에 군에 편입되었다. 그들 가운데 전후 프로야구계를 이끌었어야 할 일재가 포함되어 있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재능이 꽃피기 전에 목숨을 잃었기에, 그들의 잠재적 공헌을 헤아리는 것은 영원히 불가능하다. 전후 복원한 선수 중에는 프로에 입단하여 활약한 이도 있었지만, 전상으로 선수 생명이 끊긴 이, 정신적 상처에서 회복하지 못한 이도 적지 않았다. 전쟁이 빼앗은 것은 목숨만이 아니라, 야구계가 누릴 수 있었을 미래의 가능성 그 자체였다.

전몰 선수의 희생이 던지는 물음

태평양전쟁에서 목숨을 잃은 야구 선수들의 존재는 스포츠와 전쟁의 관계에 대해 근원적인 물음을 던지고 있다. 그들은 개인의 기량과 노력으로 직업적 지위를 얻은 선수였지만, 국가의 전쟁 수행 앞에서 그 개인으로서의 존재가 무(無)로 돌아갔다. 전몰 선수에 대한 추도는 단순히 과거 비극에 대한 애도에 그치지 않는다. 프로 스포츠가 성립하는 전제로서의 평화의 가치, 선수를 한 사람의 인간으로 존중하는 사회의 모습, 그리고 국가가 개인의 생명과 재능을 전쟁에 소비하는 것에 대한 비판적 인식을 후세에 계승하는 일이다. 야구 명예의 전당에 기록된 전몰 선수의 이름은, 일본 프로야구가 평화와 불가분의 존재임을 조용하지만 확고하게 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