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리키 마쓰타로와 프로야구 구상
일본 프로야구는 요미우리 신문사 사장 쇼리키 마쓰타로의 구상에서 시작되었다. 1934년 쇼리키는 MLB 올스타팀을 일본에 초청하여 전일본팀과의 시범경기를 주선했다. 베이브 루스와 루 게릭 등 메이저리거의 방일은 일본 전역에 야구 열풍을 일으키며 프로야구 창설의 기운을 높였다. 같은 해 12월, 쇼리키는 대일본도쿄야구클럽(후의 요미우리 자이언츠)을 설립하여 일본 최초의 프로야구팀을 탄생시켰다. 쇼리키의 구상은 단순한 스포츠 흥행을 넘어 신문 판매 촉진과 국민 오락 창출을 결합한 웅대한 미디어 전략이었다.
직업야구연맹의 출범과 초기 고전
1936년 2월, 일본직업야구연맹이 7개 구단으로 출범하여 공식전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초기 프로야구는 아마추어 야구계의 강한 반발에 직면했다. 대학야구와 사회인야구가 주류이던 시대에 프로야구는 '돈을 위해 야구한다'며 경시되는 경향이 있었다. 관중 동원도 부진했고 구단 경영은 어려운 상황이 계속되었다. 그럼에도 사와무라 에이지와 빅토르 스타르핀 같은 스타 선수의 활약이 인기를 견인하며 프로야구는 점차 국민 스포츠로서의 지위를 확립해갔다. 1937년에는 춘추 2시즌제가 도입되어 리그 운영의 기반이 마련되었다.
전시하의 프로야구
중일전쟁이 격화되면서 프로야구는 군국주의의 강한 영향을 받게 되었다. 1940년에는 구단 영문 명칭이 금지되어 모든 팀이 일본어 이름으로 개칭을 강요받았다. 선수 징병이 잇따랐고, 사와무라 에이지를 비롯한 많은 선수가 전선으로 보내졌다. 사와무라는 1944년 전사하여 프로야구계에 큰 손실을 안겼다. 1944년 시즌은 간신히 치러졌으나, 1945년에는 전황 악화로 공식전 개최가 불가능해졌다. 전시에도 프로야구의 불씨를 지킨 관계자들의 노력은 전후 부흥을 가능하게 한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전후 부흥과 새로운 출발
1945년 11월, 종전 불과 3개월 만에 동서대항전이 개최되어 프로야구는 부활의 첫걸음을 내디뎠다. 1946년 페넌트레이스가 재개되었고, 오락에 굶주린 국민 사이에서 프로야구 인기는 급속히 높아졌다. GHQ도 스포츠 진흥을 민주화 정책의 일환으로 지지하며 프로야구 발전에 순풍을 불어넣었다. 구단 수도 증가하여 1949년에는 2리그제 전환 논의가 시작될 정도로 성장했다. 전후 부흥기의 프로야구는 국민에게 희망과 활력을 주는 존재로서 일본 사회 재건에 정신적 공헌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