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즌 401 탈삼진 - 깨지지 않는 기록
1968 년, 한신 타이거스의 에나쓰 유타카는 단일 시즌 401 탈삼진이라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웠다. 당시 20 세의 에나쓰는 49 경기에 등판하여 329 이닝을 소화했다. 이 기록은 2026 년 시점에서도 NPB 역대 단일 시즌 최다로 남아 있으며, 분업제가 정착한 투수 운용 방식을 고려하면 경신 가능성은 극히 낮다. 에나쓰의 직구는 당시 측정으로 시속 150km 를 넘었으며, 좌완에서 나오는 각도 있는 직구는 타자들에게 매우 치기 어려운 것이었다. 마찬가지로 주목할 점은 에나쓰가 그해 25 승 12 패, 방어율 2.13 의 성적을 기록했다는 것이다. 그는 단순히 삼진을 쌓아올린 것이 아니라 압도적인 투구의 결과로 이를 달성했다. 그의 401 탈삼진은 완투가 당연했던 시대의 산물이면서도, 에나쓰의 초인적인 체력과 정신력의 증거이기도 하다.
올스타전 9 연속 탈삼진의 충격
1971 년 올스타전 제 1 경기에서 에나쓰는 역사에 남을 위업을 달성했다. 선발 등판한 에나쓰는 1 회부터 3 회까지 상대한 9 명의 타자를 모두 삼진으로 잡아냈다. 게다가 그 9 명은 모두 센트럴리그를 대표하는 최고의 강타자들이었다. 오 사다하루, 나가시마 시게오, 기누가사 사치오 등 전설적인 타자들이 에나쓰의 투구 앞에 차례로 삼진을 당했다. 올스타전이라는 특별한 무대에서 9 연속 탈삼진을 달성한 것의 의미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정규 시즌 경기와 달리 올스타전에는 각 팀의 엘리트 타자들이 모인다. 이 수준의 타자 9 명을 연속으로 삼진 처리하면서 단 한 명의 주자도 허용하지 않은 것은, 에나쓰의 투구가 당시 NPB 에서 완전히 다른 차원에 있었음을 증명했다. 이 기록은 2026 년 시점에서 올스타전 역사상 최다 연속 탈삼진 기록이다.
일본시리즈에서의 에나쓰의 21 구
에나쓰 유타카 커리어에서 가장 극적인 순간은 1979 년 일본시리즈 제 7 차전에서 찾아왔다. 히로시마 도요 카프의 구원투수로 등판한 에나쓰는 9 회말 긴테쓰 버팔로즈의 맹공에 직면했다. 무사 만루라는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에서 에나쓰는 놀라운 투구를 펼쳤다. 이 장면에서 그가 던진 21 구는 후에「에나쓰의 21 구」로 영원히 기억되게 된다.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스퀴즈 번트 사인을 간파하고 고의 볼을 던져 주자를 잡아낸 플레이였다. 이 판단은 에나쓰의 높은 야구 IQ 와 큰 무대에서의 침착함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결국 에나쓰는 무실점으로 위기를 넘기며 히로시마의 우승에 공헌했다. 이 21 구는 NHK 특집 프로그램과 논픽션 작품의 소재가 되어, 일본 야구 역사상 가장 유명한 투구 장면 중 하나로 기억되고 있다. 선발에서 구원으로 전환한 후에도 에나쓰가 가장 큰 무대에서 빛을 발한 것은 그의 재능의 다면성을 보여준다.
파란만장한 인생과 야구계에 남긴 유산
화려한 기록 뒤에 에나쓰 유타카의 야구 인생은 파란으로 가득했다. 한신에서 난카이, 히로시마, 닛폰햄, 세이부까지 5 개 구단을 거친 커리어는 그의 재능과 동시에 불같은 성격을 말해준다. 한신 시절 구단과의 갈등, 난카이로의 충격적인 트레이드는 당시 야구계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그러나 히로시마에서의 부활과 일본시리즈에서의 활약은 에나쓰의 불굴의 정신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은퇴 후의 삶이 순탄하지만은 않았지만, 에나쓰가 NPB 에 남긴 공적은 빛이 바래지 않는다. 통산 206 승 158 패, 2,987 탈삼진이라는 성적은 선발과 구원 모두에서 일류의 성적을 남긴 희귀한 투수임을 보여준다. 에나쓰의 존재는 일본 야구에서「구원 에이스」라는 개념의 선구자이기도 했다. 선발 완투가 주류였던 시대에 구원투수로서의 가치를 체현한 에나쓰의 전환은, 이후 마무리 투수의 지위 향상에 길을 열었다. 에나쓰 유타카는 기록과 기억 모두에 남는 일본 야구 역사상 가장 드라마틱한 투수이다.
좌완의 무기 - 직구와 커브의 이도류
에나쓰 유타카의 투구술을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직구와 커브라는 두 가지 무기의 높은 품질이다. 좌완에서 뿌려지는 직구는 타자의 손 앞에서 뻗어 올랐고, 당시 타자들이 한결같이 증언한 것은 '보이는데도 칠 수 없다'는 감각이었다. 한편 커브는 낙차가 크고 직구와의 완급 차이로 타자의 타이밍을 완전히 흐트러뜨렸다. 에나쓰 본인은 후에 인터뷰에서 젊었을 때는 힘으로만 밀었지만 난카이 이적 후 커브 정밀도를 다시 갈고닦았다고 밝혔다. 이 두 구종의 조합이 선발 시대의 대량 탈삼진과 구원 시대의 짧은 이닝 지배력을 지탱한 기술적 토대였다. 구종이 적기에 한 구의 질을 극한까지 높인다는 사고방식은 후세 투수들에게도 영향을 주었다.
히로시마 시대의 부활과 구원 전향 결단
1976 년 난카이에서 히로시마 도요 카프로 이적한 에나쓰는 여기서 커리어 제2막의 막을 올렸다. 한신에서 선발 전성기를 보낸 에나쓰였지만 어깨 마모로 난카이에서는 성적이 부진했다. 히로시마의 고바 다케시 감독은 에나쓰를 구원으로 전향시키겠다는 대담한 기용을 결단했다. 이 전향은 선발에 대한 고집이 강했던 에나쓰 본인에게 처음에는 굴욕적인 제안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에나쓰는 구원 적성을 꽃피워 짧은 이닝에 전력을 집중하는 투구 스타일을 확립했다. 1979 년과 1980 년 세이브왕에 올라 히로시마의 황금기를 지탱하는 수호신으로 군림했다. 선발에서 구원으로의 전향 성공 사례로서 에나쓰는 후세 투수들의 이정표가 되었다.
에나쓰가 개척한 '마무리'의 개념
에나쓰 유타카가 NPB 에 가져다 준 최대 공적 중 하나는 구원 투수의 지위를 선발과 동등한 수준으로 끌어올린 것이다. 1970 년대 일본 야구에서는 선발 완투가 미덕으로 여겨졌고, 구원은 선발로 통하지 않는 투수의 수용처로 간주되기 일쑤였다. 에나쓰는 그 인식을 뒤집어 짧은 이닝에서 경기를 마무리하는 전문직으로서의 구원 투수 상을 확립했다. 히로시마 시대에 기록한 세이브 수와 일본시리즈에서의 압권의 투구는 구원 투수도 야구계의 주역이 될 수 있음을 실증했다. 이 영향은 이후 사사키 가즈히로, 다카쓰 신고 등 '수호신'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에나쓰의 존재가 없었다면 일본 야구에서 클로저 개념의 정착은 더 늦어졌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