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트리플 쓰리
1950년, 마이니치 오리온스의 벳토 가오루는 타율 .362/43 홈런/43 도루를 기록하며 NPB 최초의 트리플 쓰리를 달성했다. 파워, 스피드, 높은 타율을 겸비한 이 위업은 2015년 야나기타와 야마다가 동시에 달성할 때까지 65년간 재현되지 않았다. 전쟁 전 게이오대학의 스타였던 벳토는 2리그 체제 원년에 오리온스에 입단했다.
전후 시대의 스타
벳토의 전성기는 일본의 전후 부흥기와 맞물렸으며, 프로야구가 빠르게 국민 오락으로 자리잡던 시기였다. 강력한 좌타 스윙과 빠른 발은 그를 그 시대를 대표하는 선수로 만들었다. 그는 오리온스를 1950년 퍼시픽리그 우승과 일본시리즈 우승으로 이끌며 MVP를 수상했고, 부흥 중인 국민에게 희망을 안겨주었다.
통산 성적과 명예의 전당
1,236경기에서 타율 .293/155 홈런/556 타점/148 도루의 통산 성적은 1950년대의 공 품질과 구장 환경을 고려하면 놀라운 수치다. 1960년 은퇴 후 오리온스 감독을 역임했으며, 1979년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트리플 쓰리의 계보
벳토의 1950년 트리플 쓰리는 2015년 야나기타 (.363/34/32)와 야마다 (.329/38/34)가 동시에 달성할 때까지 65년간 홀로 남아 있었으며, 야마다는 2016년에도 연속 달성했다. NPB 역사상 단 세 명만이 이 위업을 달성했으며, 벳토는 야구 궁극의 만능 기록의「초대 달성자」로서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주공수 삼박자와 좌타자로서의 타격 기술
벳토 가오루의 가장 큰 특징은 주공수 모든 면에서 높은 수준을 유지한 종합력이었다. 좌타석에서 날린 타구는 광각으로 날아갔으며, 우측 밀어치기부터 좌측 당겨치기까지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기술을 갖추고 있었다. 수비에서는 외야수로서 강한 어깨와 넓은 수비 범위를 자랑했고, 주루에서는 항상 다음 루를 노리는 적극성이 있었다. 이러한 만능형 선수상은 게이오대학 시절 익힌 합리적 훈련법과 상황 판단력에 뒷받침되었다. 타격, 주루, 수비 세 요소를 고수준으로 겸비하는 선수는 당시 일본 야구계에서 극히 드문 존재였다.
2리그 분리와 새 시대의 상징
벳토가 정점에 선 1950년은 일본 프로야구가 단일 리그에서 2리그제로 전환한 역사적 전환점이었다. 신설된 퍼시픽리그는 관중 동원에서 센트럴리그에 고전했고, 리그의 존재 가치를 증명할 스타 선수를 절실히 필요로 했다. 벳토는 바로 그 역할을 담당하여 압도적인 성적으로 퍼시픽리그의 가치를 입증했다. 마이니치 오리온스의 우승은 새 리그가 경기 수준에서 센트럴리그에 뒤지지 않음을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이었다. 2리그제의 정착은 이후 일본 야구의 발전에 필수적이었으며, 벳토의 활약 없이는 퍼시픽리그의 초기 역사가 다른 전개를 보였을 가능성이 있다.
구사에서의 벳토의 위상과 후세에 대한 영향
벳토 가오루는 일본 프로야구 여명기에 '이상적인 야구 선수상'을 구현한 존재로 자리매김된다. 타율, 홈런, 도루를 동시에 고수준으로 달성한다는 개념은 벳토 이전에는 명확한 목표로 인식되지 않았다. 그가 트리플 쓰리라는 위업을 달성함으로써 후세 선수들에게 '주공수의 완전한 융합'이라는 도달 목표가 제시되었다. 또한 대학 야구에서 기른 지성과 품격을 프로 세계에 가져와 야구 선수의 사회적 지위 향상에도 기여했다. 지도자로서도 마이니치 감독을 역임하며 선수 육성 면에서도 발자취를 남겼다. 벳토의 존재는 일본 야구가 지향해야 할 선수의 이상상을 정의하고, 이후 야구 문화의 방향성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