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년간의 고투 - 통 모금으로 살아남은 구단
히로시마 도요 카프는 1950년 리그 가입 이후 25년간 리그 우승을 하지 못했다. 모기업이 없는 유일한 팀으로서 선수를 영입하거나 유지할 재정적 여력이 부족했다. 1951년 선수 급여를 지급하지 못해 해산 위기에 처했을 때, 히로시마 시민들이 거리 모퉁이에 통을 놓고 기부금을 모았다. 이「통 모금」이 구단을 구했고, 카프와 도시 사이에 깨지지 않는 유대를 만들었다. 1968년 도요공업(현 마쓰다)이 최대 주주가 되었지만, 팀은 여전히 만년 하위권에 머물며 상위권에 오르는 일이 드물었다.
1975년의 빨간 헬멧 혁명
전환점은 1975년에 찾아왔다. 조 루츠 감독이 헬멧 색상을 남색에서 빨간색으로 바꾸며「빨간색은 투지의 색이다」라고 선언했다. 루츠가 조기 해임된 후, 후임 고바 다케시 감독이 빨간 헬멧 철학을 계승했다. 라인업의 중심은 YK 콤비였다. 야마모토 코지는 타율 .319, 30홈런, 86타점으로 타격왕과 홈런왕 2관왕을 차지했고, 기누가사 사치오는 타율 .280에 27홈런을 기록했다. 투수 소토코바 요시로가 에이스로서 20승을 올렸다. 고바 감독의 도루와 희생번트를 활용한 적극적인 스몰볼 전술이 리그를 휩쓸었고, 요미우리의 장기 독주(1965-1973) 이후의 혼전을 뚫고 우승을 차지했다.
1975년 10월 15일 - 환희의 순간
1975년 10월 15일, 카프는 고라쿠엔 구장에서 요미우리를 상대로 페넌트를 확정했다. 원정에서의 축하였지만, 고바 감독은 기뻐하는 선수들에 의해 세 번 헹가래를 받았다. 히로시마에서는 신문이 호외를 발행했고, 시민들이 평화대로로 쏟아져 나와 축하했다. 원폭 투하 30년 후, 카프의 첫 우승은 스포츠를 초월한 의미를 가졌다. 많은 시민들은「카프가 우승한 날, 히로시마는 두 번째 부활을 경험했다」고 느꼈다. 일본시리즈에서 한큐 브레이브스에 0승 4패로 패했지만, 첫 우승의 기쁨은 도시에 오래도록 남았다.
이어진 황금시대
1975년 우승은 황금시대의 서막이었다. 고바 감독 아래 카프는 1979년 페넌트와 일본시리즈를 제패했고, 1980년 연패에 성공했으며, 1984년에도 다시 우승했다. YK 콤비의 야마모토(통산 536홈런,「미스터 레드 헬멧」)와 기누가사(세계 기록 2,215경기 연속 출장,「철인」)는 요미우리의 전설적인 ON 콤비에 필적했다. 모기업 없는 시민 구단이 자체 육성과 지역 사회의 지원만으로 왕조를 건설한 것은 NPB 역사상 가장 주목할 만한 업적 중 하나이며, 이 모델은 2016-2018년 3연패로 이어졌다.
외국인 선수가 가져온 전력 강화
1975년 히로시마의 첫 우승에는 외국인 선수의 공헌도 빼놓을 수 없었다. 1974년에 입단한 게일 홉킨스는 1루수로 타율 .277, 17홈런을 기록하며 클린업의 한 축을 담당했다. 홉킨스는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에서 5년간 메이저리그 경험을 쌓아 일본 야구 적응력이 높았다. 또한 셰인 소레타가 시즌 중 합류해 대타 비장의 카드로 승부처에서 장타력을 발휘했다. 당시 히로시마는 자금력에서 타 구단에 뒤처져 대형 트레이드나 FA 보강이 어려웠기 때문에 외국인 선수 스카우팅의 정확도가 전력 구축의 생명선이었다. 프런트의 끈질긴 조사와 교섭이 한정된 예산 속에서 전력 강화를 실현한 좋은 사례이다.
지역 밀착 경영의 원형으로서의 1975년
1975년 우승은 모기업 없는 시민 구단이 지역 지원만으로 정상에 설 수 있음을 증명했다. 이 경영 모델은 이후 '지역 밀착형 구단'의 선구자로 재평가된다. 히로시마는 연봉 경쟁에서 타 구단에 뒤처질 수밖에 없는 만큼 드래프트와 육성에 경영 자원을 집중했다. 쓰다 쓰네미, 기타벳푸 마나부, 오노 유타카 등 이후의 에이스급 투수는 모두 드래프트 지명 후 육성한 자체 선수이다. 또한 히로시마 시민구장의 관중 동원은 1975년 우승을 계기로 처음으로 연간 100만 명을 돌파했으며, 백화점 매출 증가와 음식점 활황 등의 효과는 '카프 경제권'으로 불렸다. 2009년 개장한 MAZDA Zoom-Zoom 스타디움도 이 지역 밀착 노선의 연장선상에 있다.
1975년 우승이 NPB 전체에 미친 영향
히로시마의 첫 우승은 센트럴리그 세력 균형에 결정적 전환을 가져왔다. 1965년부터 1973년까지 요미우리 독주 시대에는 리그 전체의 흥행적 매력이 저하되어 다른 구단의 팬 이탈이 문제시되었다. 히로시마의 우승은 이 구도를 무너뜨렸고, 1976년 이후 야쿠르트, 다이요(현 DeNA), 주니치 등 여러 구단이 우승을 나누는 경쟁적 시대로 이행했다. 흥행 면에서는 센트럴리그 전체 관중 동원이 1975년을 기점으로 상승세로 전환했고 TV 중계 시청률도 분산되었다. 또한 '모기업의 자금력만으로는 이길 수 없다'는 인식이 퍼져 드래프트 제도 엄격화와 FA 제도 도입 논의를 후원하는 원인이 되었다. 히로시마의 첫 우승은 한 구단의 쾌거에 그치지 않고 NPB 전체의 경쟁 환경을 바꾼 전환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