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네이도 투법과 긴테쓰 시절의 빛나는 활약
노모 히데오는 1989년 드래프트 1순위로 긴테쓰 버팔로즈에 입단했다. 등을 타자에게 보일 정도로 몸을 크게 비트는「토네이도 투법」은 입단 전부터 화제를 모았다. 루키 시즌인 1990년에 18승을 올리며 최다승과 신인왕을 동시에 수상하여 실력을 증명했다. 이후 4년 연속 최다 탈삼진을 기록하며 NPB를 대표하는 투수로서의 지위를 확립했다. 포크볼을 무기로 한 탈삼진 능력은 압도적이었으며, 1990년에는 287개의 탈삼진을 기록했다. 그러나 구단과의 관계는 점차 악화되어 연봉 협상과 투구 스타일을 둘러싼 갈등이 깊어져 갔다.
MLB 도전의 결단과 임의 은퇴
1994년 비시즌, 노모는 긴테쓰에 MLB 도전 의사를 밝혔으나 구단은 이적을 허용하지 않았다. 당시 포스팅 시스템은 존재하지 않았으며, 일본 선수가 MLB로 이적할 수 있는 제도적 경로는 사실상 전무했다. 노모는「임의 은퇴」라는 형태로 긴테쓰를 떠나 NPB 어떤 구단과도 계약할 수 없는 상태에서 도미하는 전례 없는 결단을 내렸다. 이 행동은 일본 야구계로부터 격렬한 비판을 받았다.「배신자」「이기적」이라는 목소리가 쏟아지는 가운데, 노모는 고독한 도전을 시작했다. 에이전트 단 노무라의 노력 덕분에 1995년 로스앤젤레스 다저스와 마이너리그 계약을 체결했다.
다저스에서의 성공과 NOMOMANIA
1995년, 노모는 다저스에서 선명한 데뷔를 장식했다. 토네이도 투법에서 뿌려지는 포크볼은 MLB 타자들을 농락했고, 올스타전에 선출될 정도의 활약을 보였다. 최종적으로 13승 6패, 236탈삼진으로 신인왕을 획득하며「NOMOMANIA」라 불리는 사회 현상을 일으켰다. 노모의 성공은 일본 야구에 대한 평가를 완전히 바꿔놓았다. 그때까지 MLB 관계자들 사이에서는 일본인 투수의 실력에 대한 회의적 시각이 지배적이었으나, 노모의 활약이 그 인식을 뒤집었다. 1996년에는 콜로라도 로키스전에서 노히트노런을 달성하며 그의 명성을 확고히 했다.
선구자로서의 유산
노모 히데오의 가장 큰 공적은 후속 일본인 선수들에게 MLB로의 길을 열어준 것이다. 노모의 성공이 없었다면 이치로, 마쓰이 히데키, 다르빗슈 유, 오타니 쇼헤이 등의 MLB 도전은 최소 수년은 늦어졌을 것이다. 노모의 도미는 포스팅 시스템 정비와 입찰 제도 도입 등 제도적 개혁을 촉진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MLB 통산 성적은 123승 109패로, 숫자만 보면 돌출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노모가 개척한 길의 가치는 개인 성적을 훨씬 뛰어넘는다. 일본 야구와 MLB의 가교가 된 노모 히데오는 일본 스포츠 역사상 가장 중요한 선구자 중 한 명이다.